메이지 시대 사민평등과 피차별 부락민의 해방 과정

메이지 정부의 신분 해방 정책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근대국가 형성을 위한 국민 개념의 필요성, 에도 시대 신분제도의 철폐, 피차별 부락민의 해방,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과 근대화 과정을 다룹니다.

근대국가 형성과 국민의 필요성


근대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근대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국민’의 존재가 필수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국민’이라는 개념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봉건시대에는 백성, 영민, 서민 등과 같은 말은 있어도 ‘국민’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국민’이란 근대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국가에 대한 귀속감을 가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봉건시대의 신분제도에서는 일반 서민들이 자신이 소속된 영지에 대한 귀속감은 있었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식은 희박했습니다.

따라서 근대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국민’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봉건시대의 신분제도를 철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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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의 신분제도와 사민평등

에도 시대의 신분제도는 조선이나 중국과 같이 사농공상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사’는 무사 계급으로 전체 인구의 약 5%를 차지하고, 80% 이상이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폐번치현과 동시에 ‘사민평등’을 공포하여 신분제도를 철폐했습니다. 봉건시대에 사농공상에도 속하지 않고 신분적으로 차별을 받던 피차별 부락민에 대해서도 신분해방령을 내려 모두 같은 평민이라는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일본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피차별 부락민의 신분 해방

피차별 부락민은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일종의 백정과 같은 직업을 가진 천민을 말합니다. 일본은 6세기경부터 불교가 들어오면서 육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나 말의 사체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게가레’라고 하여 더러운 것이 묻어 있다고 인식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피차별 부락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강화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피차별 부락민에 대한 신분 차별을 폐지하고 일반 평민과 같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한 마을 사람들이 피차별 부락을 습격하여 부락민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봉건적인 인습과 농민의 저항

피차별 부락민에 대한 신분 해방은 봉건적인 인습에 젖어 있던 농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메이지 정부의 근대적인 개혁정책을 이해하지 못한 농민들은 피차별 부락민을 공격하는 등 저항을 보였습니다.

이는 봉건적인 인습이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메이지 정부는 이러한 저항을 진압하고 근대적인 개혁을 추진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갈등과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근대국가로의 전환과 신분제도의 철폐

메이지 정부는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위해 신분제도의 철폐를 필수적인 과제로 삼았습니다. 신분제도의 철폐는 국민의 자의식을 형성하고, 근대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귀속감을 갖게 하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봉건적인 사회 구조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메이지 정부의 개혁은 일본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근대국가 형성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일본은 빠르게 근대화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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