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 18 정변: 일본 근대화의 전환점

존왕양이 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 교토에서 발생한 8 · 18 정변은 공무합체파와 존양파 간의 충돌로 인해 조슈번의 급진파가 일시적으로 후퇴하고 공무합체파가 주류를 이루게 된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글은 8 · 18 정변의 배경, 발생 과정, 그리고 그 의의를 상세히 다룹니다.

1863년, 존왕양이 운동의 절정


1863년은 존왕양이 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교토에는 전국 각지의 존양파(존왕양이파) 지사들이 집결했습니다.

이들은 ‘천주'(天誅)를 외치며 반대파에 대한 암살과 협박을 자행했습니다. 존양파들이 교토로 모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존왕’이 천황을 받들자는 의미였고, 당시 천황이 교토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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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의 양이 결행과 조슈번의 대응

고메이 천황은 ‘양이’를 기원하기 위해 가모(賀茂)와 이와시미즈(石清水) 신사에 행차하여 기도를 올렸고, 5월 10일을 양이 결행 기일로 정했습니다. 천황은 당시 교토에 체재 중이던 14대 쇼군 이에모치에게도 ‘양이’를 실행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조슈번(長州藩)은 5월 10일,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는 미국 상선에 포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이를 수수방관하여 조슈번은 고립 상태에 빠졌습니다.

조슈번의 존양파는 이러한 고립을 타개하고 국론을 ‘양이’로 통일하기 위해 교토로 집결하여 천황 주도의 ‘양이’ 실행을 계획했습니다.

고메이 천황의 딜레마와 공무합체

아이러니하게도 고메이 천황은 열렬한 양이주의자였지만, 존양파에 대해서는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천황은 막부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공무합체, 즉 막부와 유력 다이묘들이 연합해서 양이를 실행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공무합체파와 존양파 간의 갈등을 초래했습니다.

8 · 18 정변의 발생과 결과

8 · 18 정변은 공무합체파와 존양파가 교토에서 충돌하여 존양파 세력이 교토에서 축출당한 사건을 말합니다. 당시 사쓰마와 아이즈(会津)는 공무합체를 지지하는 쪽이었습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조정 내부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존양파 공경들을 조정에서 추방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8월 18일, 약 2천 명의 병력이 조정의 궁궐을 에워싼 가운데 7명의 존양파 공경들이 추방되었습니다. 동시에 공무합체파는 사쓰마와 아이즈의 병력을 이용하여 교토에 주재하고 있던 조슈번의 병력을 교토에서 추방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교토에서 존왕양이 운동을 주도하던 조슈를 중심으로 한 급진파 세력이 일시적으로 후퇴하고, 조정 내부는 공무합체파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8 · 18 정변의 의의와 영향

8 · 18 정변은 존왕양이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슈번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존양파의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약화되었고, 공무합체파가 조정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존왕양이 운동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존왕양이 운동은 계속되었으며, 특히 조슈번은 이후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핵심 세력으로, 이들의 연합을 ‘삿쵸(薩長)’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8 · 18 정변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일본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외세에 대한 대응 방식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났으며, 이는 결국 일본의 근대화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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