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정부의 중앙집권화와 판적봉환, 폐번치현

메이지 정부의 중앙집권화와 판적봉환, 폐번치현의 역사설명: 메이지 정부의 근대국가 제도정비 과정을 살펴봅니다. 중앙집권화의 필요성, 판적봉환과 폐번치현의 실시, 사족 반란의 발생, 그리고 사족수산 정책과 홋카이도 개발까지 메이지 시대의 주요 개혁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메이지 정부의 중앙집권화 필요성


메이지 정부는 근대적인 국가로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에도 시대의 봉건적인 영지 지배제도를 개혁해야 했습니다. 에도 시대에는 전국적인 통치권이 막부의 장군에게 있었지만, 지방의 영지는 다이묘들이 지배하는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따라서 근대적인 국가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중앙집권화를 통해 전국적인 통치권을 확보하고, 효율적인 행정과 세금 징수를 가능하게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메이지 정부는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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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적봉환

1869년에 실시된 판적봉환(版籍奉還)은 메이지 정부의 첫 번째 중앙집권화 사업이었습니다. ‘판’은 판도, 즉 ‘영지’를 의미하고, ‘적’은 백성의 ‘호적’을 의미하며, ‘봉환’은 받들어 반환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판적봉환’은 다이묘들이 자신들이 지배하던 영지와 그 영지에 소속된 백성을 모두 천황 정부에 반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중앙정부가 전국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고, 세금의 전국적인 징수가 가능해졌습니다.

사쓰마와 죠슈가 먼저 모범적으로 반납을 했으며, 다른 다이묘들도 큰 반발 없이 이를 따랐습니다. 이는 다이묘들의 통치 비용 부담을 중앙정부가 떠맡고, 연금과 특권적인 신분을 보장했기 때문입니다.

폐번치현

판적봉환 이후, 메이지 정부는 1871년에 폐번치현(廃藩置県)을 시행했습니다. ‘폐번’은 ‘번’을 폐지한다는 의미이고, ‘치현’은 ‘현’을 설치한다는 뜻입니다.

메이지 정부는 전국의 ‘번’을 폐지하고, 지방을 중앙 관하의 ‘부’와 ‘현’으로 일원화하는 행정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로써 전국 280여 개의 번을 3부 72개의 현으로 통폐합했습니다.

폐번치현은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 이어져 오던 영주들의 지배체제에 종지부를 찍은 메이지 유신 최대의 개혁이었습니다.

지방의 다이묘들은 도쿄로 이주하고, ‘번’에 대신하여 설치된 ‘현’에는 중앙정부에서 현령이 파견되었습니다.

사족 반란과 무사들의 불만

폐번치현으로 인해 각 번에 소속되어 있던 무사들이 대량 해고되었습니다. 무사들에게는 일종의 퇴직금에 해당하는 녹봉이 지급되었지만,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가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메이지 정부의 개혁적인 조치에 불만을 품은 무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사족 반란이라고 합니다. 사족 반란은 1877년까지 계속되었지만, 메이지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로 인해 메이지 정부는 무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추가적인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사족수산 정책과 홋카이도 개발

정부는 생계가 어려워진 무사들을 구제하기 위해 사족수산(士族授産) 정책을 펼쳤습니다. ‘수산’이란 직업이 없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살길을 열어주기 위해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사족들을 구제하기 위한 대표적인 사족수산 정책이 홋카이도 개발이었습니다. 황무지에 불과했던 홋카이도에 사족들을 이주시켜 대규모의 농지를 개간하여 생계를 마련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정책을 통해 무사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고, 홋카이도의 개발도 촉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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