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일본의 대정봉환과 왕정복고 쿠데타는 메이지 유신의 핵심 사건입니다.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과 신정부 수립 과정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 음모, 그리고 정치적 술수를 상세히 살펴봅니다. 일본 근대화의 결정적 전환점을 재조명합니다.
대정봉환의 의미와 배경
대정봉환은 1867년 11월,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한다는 선언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쓰마와 죠슈를 중심으로 한 도막운동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요시노부의 의도는 내전을 피하고 막부의 독재체제를 수정하여 장군을 의장으로 하는 제후들의 연합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막파의 대응과 왕정복고 쿠데타
도막파의 최종 목표는 막부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정봉환으로 인해 막부 타도의 명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도막파는 ‘왕정복고’의 쿠데타를 감행했습니다.
고메이 천황의 급사와 의혹
도막파의 계획 실행에 있어 고메이 천황의 존재는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공무합체를 지지하던 고메이 천황이 1867년 1월 36세의 나이로 급사하면서 독살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는 도막파의 권력 탈취 계획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메이지 천황의 즉위와 도막파의 전략
고메이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메이지 천황은 당시 만 15세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려운 나이였습니다. 이로 인해 삿쵸 세력은 천황의 의사를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막파는 천황의 ‘칙명’을 이용해 막부를 공격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습니다.
이와쿠라 도모미의 역할
조정에서 천황의 권위를 이용해 막부를 공격하는 데 앞장선 인물은 이와쿠라 도모미였습니다.
공경 계급인 그는 조정 내에서 도막 운동을 주도했으며, 궁궐 출입이 자유로워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고메이 천황 독살설의 유력한 주모자로도 지목되는 인물입니다.
왕정복고의 선언과 신정부 수립
1867년 12월 9일, 도막파는 병력을 동원하여 궁궐의 9개 문을 봉쇄하고 친 막부적인 공경들의 출입을 막았습니다.
이와쿠라의 주도로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선언되었고, 이는 에도 막부의 폐지와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의미했습니다. 이후 도막파의 주도로 성립된 정권을 ‘신정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대정봉환과 왕정복고의 쿠데타는 일본 근대화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막파의 정치적 술수와 권력 투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실제로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과 권모술수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봉건 체제에서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이루게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권력을 향한 치열한 경쟁과 음모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