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부의 개국 방침과 존왕양이론

페리 제독 방문 후 일본의 정치적 혼란을 다룹니다. 막부의 개국 방침과 존왕양이론의 대립, 리더십 위기, 그리고 이로 인한 일본 사회의 갈등을 설명합니다.

막부의 리더십 위기


페리 제독이 떠난 직후, 에도 막부는 심각한 리더십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2대 장군 이에요시가 60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이에사다가 13대 장군으로 즉위했지만, 병약한 그의 상태로 인해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로쥬 수석 아베 마사히로가 실질적인 전권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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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마사히로의 정책 결정 과정

아베 마사히로는 미국의 개국 요구라는 중대한 사안에 대해 단독으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250여 년간 전제정치를 펼쳐온 에도 막부였지만, 이 위기 상황에서 아베는 책임을 분담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천황과 다이묘들에게 외교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막부의 개국 방침

막부는 아편전쟁의 사례를 통해 서양의 군사력이 월등함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독단적인 결정은 향후 발생할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이에 아베는 천황과 다이묘들의 의견을 구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분산시키고자 했습니다.

존왕양이론의 등장과 확산

121대 고메이 천황은 개국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다이묘들과 전국의 무사들도 쇄국을 주장하며 존왕양이론을 내세웠습니다.

‘존왕양이’는 천황을 받들고 서양의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의미로, 이 사상은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근왕지사와 존왕양이 운동

존왕양이의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무사들을 근왕지사 또는 지사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이 주도한 정치 운동이 바로 존왕양이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막부의 개국 방침에 대한 강력한 반대 세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정치적 갈등의 심화

막부의 개국 방침과 존왕양이론의 대립은 일본 사회에 깊은 정치적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국제 정세를 고려한 막부의 입장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 가치와 민족주의적 정서를 대변하는 존왕양이론이 있었습니다.

결론

페리 제독의 내항 이후 일본은 전례 없는 정치적 위기와 갈등에 직면했습니다. 막부의 개국 방침과 존왕양이론의 대립은 단순한 정책 차이를 넘어 일본의 정체성과 미래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시기의 갈등과 논쟁은 결국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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