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페리 제독의 ‘포함외교’로 인한 일본 방문은 250년간의 쇄국 정책을 종식시켰습니다. 이 글은 페리의 전략, 일본의 반응, 그리고 이 사건이 일본 근대화에 미친 영향을 설명합니다.
비들 제독의 실패와 페리의 ‘포함외교’
비들 제독의 교섭 실패는 페리 제독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페리는 이를 바탕으로 ‘포함외교’라는 새로운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이는 거대한 군함을 앞세워 상대를 압박하는 무력시위 전술이었습니다. 페리는 인내심 있는 교섭보다는 공포를 통한 접근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페리의 우라가 도착과 일본의 반응
1853년 7월 8일, 페리는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에도 앞바다의 우라가에 도착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 근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집니다.
250년간 지속된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흑선’의 충격과 일본인들의 공포
페리가 타고 온 증기선은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전에 본 적 없는 거대한 증기선을 보고 일본인들은 공포심을 느꼈고, 이를 ‘흑선(구로후네)’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일본인 화가가 그린 페리의 상상화는 그의 실제 모습과 달리 매우 험악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일본인들이 느낀 공포를 잘 보여줍니다.
막부의 대응과 페리의 압박
막부는 처음에 하급 관리를 파견하여 페리의 목적을 파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페리는 이를 거부하고 더 높은 신분의 관리를 요구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직접 상륙하여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또한, 페리의 함대가 에도 앞바다까지 접근한 것은 막부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막부의 결정과 페리의 재방문 약속
결국 막부의 최고위 관리인 로쥬 아베 마사히로는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막부는 “장군이 병환 중”이라는 구실로 1년의 유예를 요청했고, 페리는 이를 수락하고 1년 후 재방문을 약속했습니다.
떠나기 전, 페리는 한 번 더 무력시위를 펼쳤는데, 에도 시가지가 보이는 지점까지 북상하여 군함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페리 내항의 역사적 의의
페리의 내항은 일본 근대화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에도 막부는 쇄국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습니다.
만약 페리가 오지 않았다면 에도 막부는 더 오래 존속했을 수도 있었지만, 강대한 외압에 직면하여 막부는 결국 ‘개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론
페리의 내항은 일본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의 쇄국 정책을 종식시키고 근대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포함외교’라는 강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 사건은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일본이 세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며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