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접근

18세기 후반부터 러시아, 영국, 미국 등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지역 질서가 변화했습니다. 이 글은 각국의 접근 방식과 동아시아 국가들의 대응, 그리고 그 영향을 살펴봅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과 극동 진출


18세기 후반부터 서구 세력의 동아시아 접근이 시작되었으며, 그 선두주자는 러시아였습니다. 러시아는 17세기 중엽부터 유럽 상류층의 기호품이었던 곰과 바다표범의 모피 수요 증가로 인해 시베리아를 횡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베리아 동쪽 끝에 도달한 러시아는 이곳을 ‘동방을 지배하라’는 의미의 ‘블라디보스토크’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당시 러시아의 야망을 잘 보여줍니다.

러시아는 사할린을 거쳐 홋카이도까지 진출하여 일본에 식량자원을 요구했지만,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으로 인해 무력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19세기에 들어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입과 크림 전쟁으로 극동 진출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지만, 러시아는 결코 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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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동아시아 진출

러시아의 극동 진출이 잠시 완화된 사이, 영국이 일본에 접근했습니다. 1808년 페이튼호 사건은 에도 막부를 긴장시켰고, 이는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가 일본까지 미친 사례였습니다. 1820년대에는 영국 포경선의 동아시아 진출이 증가하면서 일본 근해 출몰이 잦아졌고, 1824년 미토 해안 상륙 사건을 계기로 막부는 ‘이국선 격퇴령’을 내려 쇄국을 강화했습니다.

미국의 등장과 일본 개국 시도

19세기 중반, 미국이 일본의 쇄국 체제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 각국의 식민지 시장 확보가 본격화되면서, 미국은 후발주자로서 중국 시장에 주목했습니다. 1833년 중국과의 조약 체결을 위한 특사를 파견하고 동인도함대를 설립했습니다.

1846년 제임스 비들 제독이 일본과의 교섭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캘리포니아를 획득한 미국은 태평양 횡단 항로를 개발하면서 중간 기항지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특히 난파선의 보호, 물자 공급, 석탄 확보를 위해 홋카이도 남단의 하코다테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대응

일본의 쇄국 정책 강화

일본은 서구 열강의 접근에 대해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1825년 ‘이국선 격퇴령’을 내려 해안에 포대를 설치하고 서구 선박의 상륙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결국 19세기 중반 미국의 등장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러시아의 지속적인 남하 정책으로 인해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습니다. 18세기 시베리아를 횡단한 러시아는 19세기에 홋카이도까지 내려오면서 일본과의 충돌이 더욱 빈번해졌고, 이는 결국 20세기 초 한반도 이권을 둘러싼 러일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서구 열강 접근의 영향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

서구 열강의 접근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 질서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중국 중심의 조공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력 균형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러시아, 영국, 미국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동아시아는 국제 정치의 새로운 무대로 부상했습니다.

근대화의 촉진

서구 열강의 접근은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습니다. 특히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고, 이는 후에 동아시아 지역의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처럼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접근은 이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러시아, 영국, 미국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동아시아 국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며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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