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론 정변: 메이지 시대 일본의 대외 정책 갈등

메이지 정부와 조선의 외교 갈등을 중심으로, 정한론의 대두와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 후 벌어진 정한론 정변을 다룹니다. 일본 지식인들의 조선 멸시관과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신화가 어떻게 정한론에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봅니다.

메이지 정부와 조선의 외교 갈등


메이지 정부는 조선과의 국교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에도 막부와 교린 관계를 유지하던 조선 정부가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와의 교섭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정부는 메이지 정부가 보낸 국서의 명의가 ‘천황’의 ‘칙서’로 되어 있어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황’이나 ‘칙’이란 용어는 ‘왕’의 상위에 있는 중국 황제가 사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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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의 대두

일본에서는 조선의 국서 수리 거부를 외교적 모욕으로 간주하고,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이러한 여론을 배경으로 1873년 6월 각의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전권 사절로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이고는 조선을 설득하되, 실패할 경우 무력을 동원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과 정한론 반대

그러나 3개월 후 구미 각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이와쿠라 사절단은 정한론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특히 사이고의 친구인 오쿠보 도시미치가 극력 반대하면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시기상조와 내정 우선을 이유로 정한론을 반대했습니다.

정한론 정변의 결과

결국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파는 모두 관직에서 물러나고, 정한론을 반대한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권력의 중심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정한론 정변’이라고 부릅니다.

‘정한’이라는 용어의 기원

메이지 초기에 ‘정한론’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이유는 흥미롭습니다. 당시 한반도의 국호는 ‘조선’이었음에도 ‘정조론’이 아닌 ‘정한론’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는 에도 시대 후기부터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형성된 조선에 대한 멸시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공황후 신화와 정한론

‘정한’이라는 용어는 8세기에 편찬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신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신화는 3세기 초 신공황후가 임신한 몸으로 한반도를 정벌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메이지 초기의 정한론자들은 이 신화를 근거로 조선에 대한 우월감을 표출했습니다.

정한론 정변의 역사적 의의

정한론 정변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대외 정책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일본은 즉각적인 대외 팽창보다는 내정 개혁과 근대화에 집중하는 노선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일시적인 정책 변화였을 뿐, 후에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구미 순방 경험은 일본의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은 서구 열강의 힘을 직접 목격하고, 일본이 아직 그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정한론 반대의 주요 근거가 되었습니다.

정한론 정변은 또한 메이지 정부 내의 권력 구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정한파의 퇴진과 오쿠보 도시미치 등 개화파의 부상은 이후 일본의 근대화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일본이 단기적인 군사적 팽창보다는 장기적인 국력 증강에 집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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