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쿠라 사절단: 일본 근대화의 길을 연 외교 사절

1871년부터 1873년까지 미국과 유럽을 방문한 이와쿠라 사절단의 목적, 여정, 성과를 소개합니다. 일본 근대화에 미친 영향과 역사적 의의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개요와 목적


이와쿠라 사절단은 1871년 11월 12일부터 1873년 9월 13일까지 약 1년 10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 각국을 방문한 일본의 외교 사절단입니다. 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를 비롯한 정부 수뇌부와 유학생을 포함해 총 107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사절단의 주요 목적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일본과 조약을 맺은 각국을 방문하여 국가원수에게 국서를 전달하는 것, 둘째, 메이지 유신 이전 막부가 서양 각국과 맺은 불평등조약 개정을 위한 예비교섭을 하는 것, 셋째, 서양의 선진적인 문명의 실태를 조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쿠라-사절단-일본 근대화-이미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여정

사절단의 여정은 매우 광범위하고 장기적이었습니다. 요코하마항을 출발하여 태평양을 건너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미국 대륙을 횡단하여 워싱턴까지 가는 데에만 8개월이 소요되었습니다.

이후 대서양을 건너 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방문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12개국을 순방했습니다.

귀국 길에는 지중해에서 수에즈운하를 통과한 후 홍해를 거쳐 스리랑카,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 등 아시아의 주요 도시들도 방문했습니다.

사절단의 성과와 한계

이와쿠라 사절단의 주된 목적 중 하나였던 불평등조약 개정은 현실적으로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서구 국가들은 일본이 아직 근대적인 법 제도가 정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약 개정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절단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메이지 정부의 수뇌들이 직접 서양의 문명과 사상, 문화 등을 접하고 선진국의 실정을 체험한 것은 그들이 귀국한 후 근대국가 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절단의 구성과 특징

이와쿠라 사절단은 단순한 외교 사절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정부 고위 관료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유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유학생들은 귀국 후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며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또한, 사절단에는 도쿄대학의 역사학과 교수 구메 구니다케도 동행하여 사절단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사절단의 기록과 영향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귀국 후 전 100권에 이르는 『특명전권대사미구회람실기(特命全權大使米毆回覽実記)』라는 방대한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사절단이 방문한 곳, 견문한 내용, 그리고 그들의 소감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 일본의 서양 인식을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역사적 의의

이와쿠라 사절단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비록 당초의 목적이었던 불평등조약 개정에는 실패했지만, 이 사절단을 통해 일본의 지도자들은 서구 문명의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이후 일본의 근대화 정책 수립과 추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사절단과 함께 파견된 유학생들은 귀국 후 각 분야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끄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와쿠라 사절단은 단순한 외교 사절을 넘어 일본의 근대화와 발전의 초석을 다진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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