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어소 회의: 보신 전쟁의 시작

메이지 유신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인 소어소 회의는 일본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입니다. 이 글에서는 소어소 회의의 배경, 주요 인물, 회의 내용 및 결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소어소 회의의 배경


소어소 회의는 메이지 천황의 왕정복고 선언 직후, 1867년 12월 9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궁궐 내의 소어소 건물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메이지 천황의 임석 하에 진행되었지만, 천황은 형식적인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회의의 주요 안건은 도쿠가와 요시노부 장군의 처우 문제였습니다.

공무합체파와 도막파의 대립

회의에 참석한 공무합체파는 요시노부 장군을 회의에서 배제한 것을 비난하며, 요시노부를 의장으로 하는 연합 정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해 도막파는 요시노부 장군의 ‘사관(辭官)’과 ‘납지(納地)’를 요구했습니다. ‘사관’은 장군직을 사임하라는 의미이고, ‘납지’는 장군이 소유한 영지를 조정에 반납하라는 요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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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도모미의 반격

공무합체파의 비난에 대해 이와쿠라 도모미는 막부의 실정을 열거하며, ‘사관’과 ‘납지’를 통해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와쿠라는 반대파에게 무력 행사도 불사한다는 의도를 비추며, 반대파를 압도했습니다. 당시 궁궐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지휘하는 사쓰마 병력이 에워싸고 있었고, 여차하면 반대파들을 무력으로 제거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습니다.

요시노부 장군의 탈출

회의에서 요시노부 장군의 ‘사관’과 ‘납지’가 결정되자, 교토에서 멀지 않은 오사카에 있던 요시노부 장군은 이 소식을 듣고 황급히 오사카를 탈출하여 에도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도막파의 결정을 거부하고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보신 전쟁의 발발

요시노부 장군의 탈출 소식을 접한 도막파는 즉시 병력을 동원하여 구막부에 대한 토벌을 시작했습니다. 신정부군과 구막부군 간의 전투는 약 1년 반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 내전은 ‘보신 전쟁’이라고 불립니다. 1868년이 12간지로 보신(戊辰)년, 즉 용띠 해에 해당하는 무진년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결론

소어소 회의는 메이지 유신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일본의 정치적 변화를 촉발한 사건입니다. 이 회의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 장군의 ‘사관’과 ‘납지’가 결정되면서, 막부 체제는 붕괴하고 새로운 메이지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보신 전쟁은 일본의 근대화와 중앙집권화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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