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라다야 사건: 교토에서 벌어진 사쓰마 번의 내분

1862년 교토의 데라다야에서 발생한 사쓰마 번의 내분 사건을 상세히 분석합니다. 존왕양이파와 시마즈 히사미쓰의 대립, 그리고 이 사건이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펴봅니다.

사건의 배경


1862년, 교토에 위치한 여관 데라다야(寺田屋)에서 사쓰마 번의 존왕양이파 무사들이 모여 막부 고관 암살을 모의하던 중, 이들의 거동을 진압하기 위해 사쓰마 번주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가 파견한 신하들에 의해 진압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사쓰마 번의 과격파 무사들이 서양과 교섭을 추진하는 막부 고관을 암살하고 그 수급을 시마즈 히사미쓰에게 바쳐 봉기를 일으키려는 계획에서 비롯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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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 번과 존왕양이 운동

사쓰마는 현재 규슈 남단에 위치한 가고시마현(鹿児島県)의 옛 이름으로, 메이지 유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 배출된 지역입니다.

당시 사쓰마 번의 과격파 무사들은 영주의 허락 없이 영지를 이탈하여 교토에 모여 막부 고관 암살을 모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봉건사회에서 엄벌을 받을 탈번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시마즈 히사미쓰의 대응

사쓰마 번의 존왕양이파가 교토에 집결해 모의를 도모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시마즈 히사미쓰는 이들의 거동을 막기 위해 검술 실력이 뛰어난 9명의 신하를 교토로 파견하여 소환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과격파는 시마즈 히사미쓰의 소환 명령에 응하지 않았고, 격론 끝에 여관 안에서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과격파 6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부상당한 2명도 나중에 할복을 명령받고 자결했습니다. 진압파도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치열한 난투극이었습니다.

사건의 결과와 공무합체 정책

이 사건 후, 시마즈 히사미쓰는 공무합체(公武合体)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에도로 향했습니다. 공무합체란 막부와 유력한 영주들이 합의 정치를 통해 난국을 타개하자는 정책론으로, 존왕양이 운동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존왕양이 운동은 주로 하급 무사들이 주창한 것으로, 막부의 고관이나 영주들이 볼 때 신분이 낮은 신하들이 나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히사미쓰는 존왕양이 운동을 억제하고 유력한 영주와 막부가 힘을 합쳐 난국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장군을 만나기 위해 에도로 상경한 것입니다.

데라다야 사건의 의의

데라다야 사건은 사쓰마 번 내의 내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쓰마 번의 과격파 무사들이 진압되었고, 시마즈 히사미쓰가 추진한 공무합체 정책은 이후 일본의 정치적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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