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 정벌: 에도 막부의 발악과 메이지 유신의 서막

조슈 정벌은 에도 막부의 쇠퇴와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조슈번은 막부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고, 이는 결국 일본의 근대화와 제국주의 확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슈 정벌의 배경과 시작


1864년 7월 23일, 천황으로부터 조슈 정벌의 칙명을 받은 막부는 35개 번에서 15만 병력을 동원하여 정벌군을 편성했습니다. 이는 조슈번의 여러 차례 막부 전복 시도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정벌군의 총독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0번째 아들의 후손인 오와리번의 영주 도쿠가와 이에가쓰가 지명되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역할과 전략

실질적인 권한은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전적으로 위임되었습니다. 사이고는 전투를 피하고 조슈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는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그는 ‘금문의 변’ 관련자들의 처벌과 양이파 공경의 추방 등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조슈를 궁지에 몰아넣고 내부 갈등을 유발하려는 의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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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조슈 정벌의 결과

사이고의 전략은 성공을 거두어 조슈는 보수파의 주도로 제안을 수용하고 막부에 대한 ‘공순’을 표명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벌군은 실제 전투 없이 1864년 12월에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제1차 조슈 정벌은 대치 상태로 종결되었습니다.

조슈번의 내부 변화와 제2차 정벌

1차 정벌 이후 조슈번은 잠시 보수파가 실권을 잡았으나, 다카스기 신사쿠의 쿠데타로 다시 급진파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에 막부는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을 단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각 번의 소극적인 태도와 사쓰마번의 출병 거부 등으로 인해 막부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2차 조슈 정벌의 전개와 결과

1866년 6월부터 시작된 제2차 정벌에서 조슈번은 다카스기 신사쿠의 지휘 아래 강력한 저항을 보였습니다. 막부군은 예상 외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고, 에도와 오사카에서 발생한 농민봉기로 인해 더욱 불리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결정적으로 14대 장군 이에모치와 고메이 천황의 연이은 사망으로 인해 막부는 정벌을 중단할 명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조슈 정벌의 의의와 영향

조슈 정벌의 실패는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습니다. 반면 조슈번 출신 무사들은 이후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고 일본의 근대국가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인물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이들은 후에 대만과 조선 침략에도 관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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