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화친조약: 일본의 개국과 불평등조약의 시작

1854년 페리 제독의 재방문으로 체결된 미일화친조약의 배경과 내용을 다룹니다. 일본의 개국 과정, 조약의 불평등성, 그리고 미국의 통상조약 추진 노력을 설명합니다.

페리의 재방문과 무력시위


1854년, 페리 제독은 약속보다 6개월 일찍 일본을 재방문했습니다. 이는 에도 막부의 장군 사망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이번에는 7척의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와 더 강력한 무력시위를 펼쳤습니다. 당시 일본인 화가가 그린 그림에서 에도만에 정박한 페리의 함대의 위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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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가와 조약의 체결

막부는 페리의 압박에 굴복하여 약 1개월간의 협의 끝에 가나가와에서 화친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은 체결 장소인 가나가와(현재의 요코하마)의 이름을 따 ‘가나가와 조약’이라고도 불립니다.

조약의 주요 내용

미일화친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시모다와 하코다테 개항
  2. 시모다에 미국 영사관 설치
  3. 미국 선박에 물자 공급
  4. 미국 선박 조난 시 선원 구조 및 송환
  5. 편무적 최혜국대우 제공

불평등조약의 성격

이 조약은 일본에게 일방적인 의무를 부과하는 불평등조약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특히 편무적 최혜국대우 조항은 일본이 다른 국가와 맺은 조약의 혜택을 자동으로 미국에게도 적용하게 만들어, 일본에게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미국의 궁극적 목표: 통상조약

미국의 실제 목표는 단순한 화친조약이 아닌 통상조약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타운센드 해리스가 파견되었습니다. 해리스는 1856년 초대 주일 영사로 부임하여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해리스의 압박 전략

해리스는 1857년 에도성에서 장군을 알현하며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강경한 태도로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당시 진행 중이던 2차 아편전쟁(애로우호 사건)에서 청나라가 영불 연합군에 패배한 사실을 언급하며 막부를 압박했습니다.

결론

미일화친조약은 일본의 개국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불평등조약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국의 이익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해리스의 노력으로 체결된 통상조약은 일본에 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며, 이는 결국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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